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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에 불과한 욕망, 그 허망함의 끝 구보, 영화를 보다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는 여느 영화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지만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인해 좀처럼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작품이다. 우즈키(마츠 다카코 분)는 짝사랑하는 고등학교 선배 야마자키(다나베 세이치 분)와 같은 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 홋카이도를 떠나 도쿄의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다. 그녀에게 도쿄는 무사시노이고 무사시노는 곧 야마자키가 있는 곳이다. 야마자키가 없다면 무사시노도 그리고 도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즈키가 열심히 공부한 것도 그래서 무사시노 대학에 원서를 내고 마침내 도코행 기차를 타려는 것은 오로지 선배 야마자키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결국 도쿄와 무사시노에 대한 우즈키의 욕망은 야마자키 선배를 가까이 보고 나아가 그와 연인이 되는 것에 맞닿아 있다.




공간은 주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물리적 가능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행위가 가능해야만, 적어도 그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만약 야마자키 선배가 진학한 대학이 무사시노가 아니라 와세다나 게이오였다면, 혹은 교토에 있는 도시샤였다면 우즈키가 무사시노를 동경하거나 도쿄행을 그토록 열망했을 리 없다. 무사시노와 도쿄는 야마자키가 있는 공간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간은 특정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실체이며 그 행위와 연계될 때 비로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하기에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여러가지로 의문이 남는다.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며 "그곳에 가서야 내 삶이 새로 시작"된다는 '나'의 말은 그가 곰스크행 계획을 세운 것이 오래 전 일이었음을, 그곳에서만 자신의 삶이 새로 시작될 수 있다는 확신은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에게 곰스크는 자신의 인생 그 자체라면 곰스크에 왜 가는지 묻는 호텔 여주인에게 "그냥 일단" 곰스크로 가는 게 목표라는 '나'의 대답은 허망하게 들린다. '그냥, 일단"이라는 말은 곰스크로 가려는 '나'의 강렬한 열망이 기의가 사라져버린 단순한 기표에 불과한 것으로 바꾸면서 결과적으로 '나'의 욕망의 민낯을 비추기 때문이다. 선배를 만나기 위해 도쿄로 가려는 우즈키와 달리 '나'에게 곰스크는 '가야할 곳'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 '나'는 우즈키와 다른가. 둘 다 특정한 공간에 가려는 욕망은 동일함에도 우즈키와 달리 '나'는 곰스크에서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이 물음은 중요하다. '나'의 욕망이 기의가 없는 텅빈 기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나'가 곰스크행을 열망한 이유는 소설이나 드라마 모두에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곰스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는 부분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곰스크행에 관한 욕망은 '나'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와 다른 이들에게 들은 풍문은  곰스크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구도는 '나'의 곰스크행 욕망이 '나'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욕망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는 자신의 욕망 실현자가 아닌 아버지 욕망의 대리자로 전락하게 된다.



 욕망을 대리 실현하려는 동력은 본질적으로 지속력을 갖기 어렵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의 기원이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나'는 자신과 아버지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자식을 낳고 마을의 교사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곰스크행이 가능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곰스크행 특급열차의 기적소리를  듣고 우울해 하는 것은 기원이 지워진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흔적은 위험한 것이다. 해소되지 않은 욕망이 남긴 흔적은 또다른 가짜 욕망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자식 역시 곰스크행을 열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기의를 상실한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또다른 욕망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 '나'는 기원이 지워진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슬픈 시찌프스일 뿐이다. 동력을 잃은 욕망의 흔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찢어질 듯한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를 다락방에 가두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연민을 보낼 수는 없다. 우리 역시 '나'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기억되려는 욕망 그리고 기억하는 자 구보, 영화를 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덴고는 열살 때 교실에서 자신의 손을 아주 짧은 순간 꼭 잡았다가 사라진 아오마메를 잊지 못한다. 아오마메 역시 오직 덴고만을 생각하며 그외에는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열 살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들이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아주 짧은 시간 손을 꼭 잡았던 기억이었다. 


 기억이 삶을 이어가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임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기억은 근본적으로 그가 한 경험들과 맞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은 경험에 투자하는 것'이라는 어느 재테크 전문가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여행이 그 자체로 경험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여행에 쓰는 돈은 가장 현명한 투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힐링일 수도, 미지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자신의 무엇을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이 필연적으로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은 항상 감각의 차원에서 활성화된다. 여행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렇다. 일본 야마시로 온천에서 아내와 갑자기 맞았던 일본해 북풍의 강렬함, 엘리도에 도착하자마자 먹었던 갓익은 망고의 상큼한 단맛, 크라비 바닷가 선술집에서 호주인의 노킹 온 헤븐스도어를 들으며 마셨던 맥주의 청량감,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내소사 경내를 혼자 걸으며 들었던 풍경소리. 나에게도 기억은 늘 순간의 감각으로 인지된다. 아오마메가 자신의 손을 아주 짧은 순간 꼭 잡았던 감각을 기억하는 덴고처럼.  어쩌면 인간의 삶은 온통 기억의 조각들로 이어진 조각보일지도 모른다. 

그림 출처 : 중앙일보



 최근 개봉한 영화 <무뢰한><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혹자는 두 개의 영화를 신데렐라 스토리에 비유하는 모양이다. 호박을 마차로 만들어 준 요정 할머니와 자신을 왕비로 맞이하는 왕자님을 믿었던 신데렐라처럼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 분)은 남자들을 쉽게 믿는 반면,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는 아무도 믿지 않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유를 통한 해석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매드맥스>를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할만한 여지들이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퓨리오사가 걸어가는 길 그리고 그가 만든 길에는 항상 맥스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꿈꾸었던 녹색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변했음을 알고 소금사막으로 떠나려는 퓨리오사와 여전사들을 그들이 탈출했던 공간으로 되돌아가도록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한 존재는 다름 아닌 맥스였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하기 쉽지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물론 맥스는 신데렐라에서 나오는 왕자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든 문제들을 맥스가 해결하지는 않는다. 또한  맥스는 퓨리오사와 여전사의 길고 위험한 여정에 동행한 조력자이며 그들이 모두 '함께'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 주목할 때 맥스가 신데렐라에 나오는 왕자님을 재현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매드맥스>를 신데렐라의 스토리텔링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해석은 거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그보다는  개인들의 '기억되려는 욕망'이라는 키워드가 더 유효하지 않을까. 임모탄의 공격을 받아 사경을 해메던 퓨리오사를 바라보면서 맥스는 '내 이름은 맥스'라고 격렬히 외친다. 퓨리오사를 처음 만난 맥스가 '이름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이름은 하나의 존재를 가장 명징하게 기억하도록 만드는 기호라는 점에서 맥스의 외침은 퓨리오사에게 '기억되려는' 욕망의 발현체이다. 생성된 감정의 유대가 기억되려는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워보이 눅스는 어떤가. 눅스는 임모탄의 충직한 전사로 '기억'되어 전사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가고 싶어한다. 임모탄이 약속한 천국이 허구임을 깨닫고 퓨리오사와 여전사들을 돕다가 죽음에 이른 순간에도 눅스가 외친 말은 '나를 기억해줘'였다. 퓨리오사와 맥스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임모탄 역시 기억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임모탄이 퓨리오사와 맥스를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자신의 자식들을 임신할 수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을 되찾아오기 위해서였다. 임모탄이 죽은 스플렌디드가 사산한 남자 아기를 안고 광기에 사로잡혀 오열했던 것은 자신의 사후에 기억될 수 있는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것에 대한 좌절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기억되기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기억하는 자를 호출해낸다. 영화 <무뢰한>에서 김혜경은 기억하는 자이다.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기억하고 그를 쫒는 형사 정재곤(김남길 분)을 기억한다. 얼핏 보면 정재곤은 범인을 잡기 위해 김혜경을 철저히 이용하는 남자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정재곤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균열지점을 바라보자. 그 역시 자신이 김혜경에게 그렇게 기억되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다. 그 두려움은 작게는 김혜경이 가장 좋아했지만 빚 때문에 중고명품샵에 팔아버린 귀고리를 되사서 건네주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물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자신을 찌른 김혜경에게 보이는 반응이다. 김혜경은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물론 이는 김혜경의 생각이지만)  인생의 막장에서도 또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버린 정재곤을 저주하며 칼로 찌른다. 하지만 정재곤은 주변에 범인을 체포하고 있는 경찰들이 있었는데도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그냥 태연히 보낸다. 김혜경이 찌른 칼을 복부에 그대로 둔 채 비탈길을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그의 얼굴에 비친 쓴 웃음은 그녀에게 냉혈한으로 기억되지 않으려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정재곤이 김혜경을 사랑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내면에는 자신이 처한 모순적 현실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면서도 김혜경에게 결코 냉혈한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 내내 비치는 정재곤의 과잉된 고독감을 설명하기 어렵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기억되려는 욕망이 온전히 기억하는 자에게 실현된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환타지일 것이다. 정재곤의 욕망은 그 자신의 욕망일 뿐, 그것이 김혜경의 기억에서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기억되려는 욕망과 기억하는 자는 별개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기억되려는 욕망은 항상 애절하고 때로는 비장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게 되는 '나를 기억해줘' 류의 씬(scene)들이 그토록 애절했던 것은 기억되려는 욕망이 실현되기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억되려는 욕망들은 끊임없이 기억하는 자를 지향한다. 그것은 기억되려는 욕망이 지닌 천형이자 운명일 것이다.      



환멸의 감정을 목도하다 진실은 무엇인가(다우트)


 다우트(Doubt, 2008)
  

난 대개 일본 영화나 중국 영화

혹은 영국 영화를 즐겨보는 편이기는 하지만 

헐리우드 영화라고 외면하지는 않는다.

사실 웰메이드라는 차원에서 보면 헐리우드 영화들은 장르별로 그 전범을 보여줄 정도로 수준이 높다. 대부분의 장르가 그렇지만 내가 보기에 특히 로맨틱 코미디 영화에 관해서는 세계 최고의 경쟁력과 노하우를 가지고 있다. 다른 나라들에서 제작되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들이 헐리우드의 코드들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는 걸 볼 때면 내 짐작이 그리 틀린 것 같지는 않다. 고로 난 많이 보지는 않지만 헐리우드 영화도 좋아한다. 서투른 연출의 3류 액션영화만 아니라면. 

  우리는 흔히 헐리우드 영화를 ‘킬링타임용’으로 생각한다. 아마 이런 선입견은 흔히 극장에서 볼 수 있는 액션영화들이나 재난영화들이 내놓는 뻔한 결말에 익숙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다우트Doubt>는 헐리우드가 지닌 진정한 역량이 무엇인지를 뚜렷이 느끼게 만드는 작품이다. 조폭영화가 한 편 대박을 치면 그 아류들이 줄줄이 나타나곤 하는 한국의 상황에서는 이런 수준의 영화가 출현하기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다우트>를 보면서 난 문득문득 클린드 이스트우드를 떠올렸다.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영화들에 등장하는 인간은 모두 불완전하다.(대표적으로 그랜토리노밀리언달러 베이비를 보라) 이는 당연한 것임에도 사람들은 영화를 볼 때 대개 이 사실을 잊는다. 영화의 인물들은 그것을 바라보고 있는 우리와는 다르기를 바라는 무의식이 영화를 보는 내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클린트 이스트우드는, 잔인하게도, 우리와 같은, 즉 자신을 감싸는 엄혹한 현실에 무력하고 그래서 종종 패배하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영화들이 그렇게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인간애에 대한 믿음’이 기저에 짙게 깔려있기 때문일 것이다.) 

  헐리우드 영화의 계보에 대해서는 별로 아는 게 없지만  <다우트>는 최근 몇 년간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탐구하는 ‘인간이라는 존재 그 자체’라는 명제에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다우트> 는 사실 보는 내내 불편한 느낌이 드는 영화다. 주인공인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는 모두 ‘불완전한 존재로서의 인간’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자신의 가치관에서 단 한 뼘도 물러나지 않으려는 두 인물의 모습, 근거없는 의심을 확신으로 바꿔내면서 한 인간의 성품을 재단하려는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 분)의 심리는 사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너무나 흔하게 범하는 행위들이 아니던가. 관객들이 부지불식간에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보낼지도 모르는 일종의 분노감은 어쩌면 그런 행위들을 아무런 반성이나 성찰 없이 습관적으로 저지르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한 것인지도 모른다. 도널드의 어머니인 밀러 부인(비올라 데이비스 분)이 알로이시스 수녀에게 '아들이 졸업만 할 수 있으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절규하는 모습은 진실을 마주보기 보다는 자신이 원하는 대로 믿고 싶어하는 인간들의 나약한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다.


이미지 출처 : 다음 영화  

 그래서 <다우트>는 불편하다. 알로이시스 수녀에 비해 인간적으로 비치는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 분) 역시 자신이 집전하는 미사의 강론에서 은유적으로 알로이시스 수녀를 ‘비난’한다. 이를 알로이시스 수녀의 회개를 촉구하는 코드로 읽힐 수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건 악의적 ‘비난’의 수준을 넘지 못하는 비열한 행위일 뿐이다. 그런 것이다. 길 잃고 헤매는 어린 양들을 신에게 인도해야 하는 사명을 지닌 성직자나 수도자 역시 개인적으로는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에 지나지 않는다.




  난 때때로 환멸의 감정을 경험하고는 한다. 내 자신이 지닌 나약하고 미약한 모습, 남에게는 들키고 싶지 않는 비열한 모습을 생경하게 목도하는 순간들에서 경험하는 환멸의 감정은 때로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부인하고 싶은 극단적 상태로까지 전이되기도 한다. 아마 이것이 영화를 보고 있는 나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다우트>를 보면서 줄곧 피할 수 없는 감정 역시 두 인물에 오버랩되는 나 자신에 대한 환멸이었으니까.


 영화가 예술의 반열에 오른 것은 그것을 향유하는 주체에게 반성적 사고를 자극하기 때문일 것이다. <다우트>는 그 역할에 몹시 충실한 작품이다. 그 충실함이 비록 환멸의 감정으로 이끌지라도 말이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PhotoList.do?movieId=47514&t__nil_PhotoList=tabName


이글루스 가든 - 제대로 된 글 쓰기.

주체와 타자의 관계, 둘 사이의 이해는 가능한가 진실은 무엇인가(다우트)

  
  내가 아닌 타인을, 보다 자세히 말하면 타인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TV 드라마에서 종종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내가 네 심정 다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의 심정에 공감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심정을 다 이해할까. 반대로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을까. 말처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시월드'라는 말은 애초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타인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차이로 인해 이루어지기 어렵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결국 자신의 처지 그리고 경험을 통해 형성된 수용의 폭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타인의 처지나 심정에 대한 공감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지게 되고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자신은 타인에게 너그럽게 대한다고, 때로는 자신이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는 타인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양보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영화 <다우트>는 진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의심과 인간 주체 내부의 회의를 다룬다. 이것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모티프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특별하다. 몇 개의 겹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의미 층위는 이 영화가 표면적 주제와는 별도로 또 다른 복잡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학교의 유일한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어머니,
밀러부인과 수녀원 원장이자 학교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화는 주체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의 아들이 신부에게 성적 희롱을 받고 있다는 원장 수녀의 말을 밀러부인은 받아들이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당면 목표는 아들이 무사히 이 학교를 졸업해서 더 좋은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일이다.  '진실'(물론 명확한 증거 없이 원장 수녀만이 진실이라고 믿는)에 대한 외면에 원장 수녀는 분노한다. 어떻게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들이 그런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밀러 부인을 원장 수녀는 이해할 수 없다. 이성과 감성의 대립. 밀러 부인에게는 원장 수녀의 명백한 논리보다 자신의 아들을 무조건 지켜주는 애정이 더 소중하다. 그것이 비논리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원장 수녀의 '합리적 의심에 입각한 진실'은 '아들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이 소중한 밀러 부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밀러 부인에게는 오히려 그 진실일지도 모르는 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 그는 온통 백인 학생들만 있는 학교에서 흑인인 자신의 아들을 감싸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성적 성향이 어떻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둘에게 서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원장 수녀는 어떻게 진실이 그런 하찮은 목표로 인해 외면당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밀러 부인은 아들이 보다 좋은 교육을 받고 대학을 진학하여 자신과는 다른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은 유일한 목표일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렬한, 때로는 목숨을 걸만큼 소중한 욕망이자 신념인지 원장 수녀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처음부터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강은 인종 문제 이와 연관된 사회 계급과 경제적 권력 혹은 지위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입장 등의 담론들로 얽혀 있다. 백인인 원장 수녀와 하급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흑인 밀러 부인 사이에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이 놓인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그리고 타자의 그것을 함께 바라보지 않는다면 둘 사이의 평행선을 좁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PhotoList.do?movieId=47514&t__nil_PhotoList=tabName


요즘 우리 사회 역시 맥락과 배경은 지워진 채로 어떤 사건들이 날 것 그대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진보와 보수라는 사실은 경계를 명확하게 짓기 어려운 범주로 나누어져 서로가 첨예하게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는 것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쪽은 원장 수녀로 또 한 쪽은 밀러부인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 지식인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들 역시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또 하나의 원장 수녀와 밀러 부인으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며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김보성의 의리와 다른 의리 사이의 거리 구보, 세상을 읽다

  원래 그 사람의 이름은 허석이었다. 꽤 오래 전에 이름을 바꿨던 걸로 기억한다. '의리'의 대명사, 김보성 말이다. (20년 정도 된 일인데도 TV에서 그 사람을 볼 때 마다 난 예전 이름이 떠오르곤 한다)  요즘 유튜브에서 가장 화제가 되는 동영상 중의 하나는 그가  주인공인 '식혜'광고란다. 이 사실을 알게 된 것은 김보성에 대해 깨알같은 비하인드 스토리를 적은 한 TV 칼럼리스트의 칼럼에서였다. 'TV 칼럼리스트가 되려면 연예인 내부 사정까지 속속들이 알아야 하는구나'라는 사실에 감탄하면서 말이다. 김보성의 '의리'에 대한 그럴듯한 분석과 함께 항상 불안이 내재된 현대인들에게 '의리'라는 단순하면서도 명쾌한 전근대적 가치가 일종의 위로를 주는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 글의 요지였다.


  그 칼럼에서 촉발된 것이기는 하지만 내 생각의 방향은 조금 다르다. 먼저 나의 흥미를 자극한 것은 '왜 지금 의리인가'하는 일종의 타이밍에 관련된 부분이다. 그 칼럼리스트가 말한 것처럼 김보성이 의리를 외치기 시작한 것은 이미 십수 년 전부터이다. 그런데 왜 갑자기 지금 그의 '의리'가 새삼 부각되는가 말이다. 세월호 합동분향소에서 대출까지 받아 성금을 내는 김보성의 모습이 클로즈업되고 무한도전 차세대 리더를 뽑는 선거 유세장에 갑자기 나타나 찬조 연설을 하기도 하고 게다가 '의리로 먹는' 식혜 광고에 등장하는 시점이 공교롭게도 겹친다. 게다가 요즘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는 다른 남자 배우와 같이 화장품 광고도 찍었다고 한다. 이러한 일련의 일들이 거의 동시에 일어나는 것이 과연 우연일까. 

 


 그간 '김보성의 의리'는 사실 일회적 예능 콘텐츠로서 소비되었던 것을 부인하기 어렵다.(최근 한밤의 TV연예에 비친 그의 모습 역시 그러하다) 세상의 모든 일을 '의리'라는 하나의 단어로 모조리 수렴시키는 김보성의 발화 방식은 그 자체로 논리성을 소거해버린다. 논리성이 소거된, 즉 밑도 끝도 없는 발화방식은 예능에서만 통할 수 있는 것이다. '의리'를 열변하는 그의 모습은 늘 진지하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의 '의리'를 '항상' 예능적 관점에서만 '즐긴다'.(사실 웃음의 강도는 둘 사이의 낙차가 클수록 더 커진다) 논리가 소거되고 감각만 남은 어휘가 된 '의리'는 무협이나 홍콩느와르에서 말하는 '강호의 도'와 비슷한 말로 기의는 없고 기표만 남는다. 기표만 남은 단어는 무엇과도 접합될 수 있다. 때때로 '의리'라는 단어는 쉽게 복고적 분위기와 접합되어 키치적 감성을 띠기도 한다.(김보성의 식혜 광고를 보라

 복고적 분위기와 쉽게 접합될 수 있는 이유는 '의리'가 전근대적인 느낌을 지닌 개념이기 때문이다. 사람 사이의 '정'과 '인간적 도리'를 바탕으로 하는 '의리'는 흔히 합리적인 영역의 반대편에 놓여 있는 것으로 인식된다. 우리 사회에서 '정'과 '인간적 도리'는 일반적으로 '합리적인 '계약'을 기반으로 하는 근대적 관계와는 거리가 있다고 여긴다. 그렇기에 앞의 칼럼리스트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이 근대적 합리성에 지친 우리사회가 인간적인 '의리'에 공감을 하게 되었다는 해석을 내세운다. 얼핏 들으면 그럴듯해 보인다. 

 그러면 난 이렇게 묻고 싶다. 그간 우리사회가 '과연' 합리적이었는가. 또 우리사회의 근간이 과연 엄격한 '계약'으로 이루어져 있는가 말이다. 그렇다면 세월호와 같은 눈으로 보고도 믿기 어려운 '사고'가 일어날 수 있는가. 작금처럼 언론 보도의 불공정 시비가 끊이지 않을 수 있는가. 우리가 그간 '합리적인 계약'이라고 생각해왔던 것들의 대부분은 사실 합리적인 것이 아니라 '이기적'인 것은 아니었을까. 정글같은 경쟁이 일상적으로 일어나는 우리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자신의 이익만을 챙기는 '이기적인' 태도를 '근대적 합리성'으로 치환하여 스스로를 기반했던 것은 아니었는가 말이다. 나의 이익을 극대화시키기 위해 불법이 횡행하고 자신의 불법을 은폐하거나 유지하기 위해 타인의 불법에 대해서도 관대해진다. 그간 우리사회에서 '의리'는 이런 구조를 보다 견고하게 만드는데 일조했던 것은 아닐까.   

 '의리'라는 단어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니 칼럼리스트의 말대로 3개의 의미가 있다. '의리는 사랑과 연결된다'는 김보성의 의리는 첫 번째와 두번째 의미인 '사람으로서/ 사람과의 관계에 있어서 마땅히 지켜야 할 도리'일 것이다. 그러나 그간 우리가 소위 '의리'라고 여겨왔던 것은 세 번째 의미인 '남남끼리 혈족의 관계를 맺는 일'에 가깝지 않았나 싶다. '혈족'은 아니더라도 '혈족과 같은'사이로 자신의 이익을 최대화하고 이를 통해 생존력을 높이는 그런 '의리'말이다. 

 
합리성에 기반한 계약은 기본적으로 '상호 이익'을 전제한다. 그렇지 않으면 쌍방의 의사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약은 성립될 수 없 다. 또한 계약이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 과정의 투명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런 계약을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던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가 그동안 근대적 합리성이라고 믿었던 것은 사실 가장 전근대적인 인습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리고 '좋은게 좋은' 그리고 '인간적인' '의리'는 이러한 인습들이 기생하도록 만든 숙주였던 것이다. 아닌 말로 음료가 맛있어야 먹는 것이지 '의리'로 먹을 수는 없다. '의리'에 의한 구매는 오래가지 못한다. 

 



지금이야말로 오히려 근대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계약 관계를 우리 사회의 근간으로 삼아야 할 때라고 본다. 일각에서는 이런 관계가 비인간적이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런 계약이 '비인간적'인가 아니면 모호한 '의리'를 지키다 수많은 희생을 불러일으킨 이번 참사가 비인간적인가.
     



덧붙임 :    기표만 남아 쉽게 상업화되는 '모호한' 의리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 사실 우리는 그간 '의리'의 본 의미를 잊은 채 너무나 많이 가짜 '의리'를 지켜온 것은 아닐까. '의리'가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사람이 도리를 지키는 것은 결국 순리를 따르는 것이다. 순리를 따른다는 것은 거창한 것이 아니다. 내가 하는 행동이 한 사회가 인정하는 상식적이고 도덕적인 범주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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