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아닌 타인을, 보다 자세히 말하면 타인의 처지를 온전히 이해한다는 것이 가능할까. TV 드라마에서 종종 시어머니가 며느리에게 '내가 네 심정 다 안다'라고 말하는 것은 '너의 심정에 공감한다'는 것의 다른 표현일 것이다. 그런데 과연 시어머니는 며느리의 심정을 다 이해할까. 반대로 며느리는 시어머니의 마음을 진정으로 공감할 수 있을까. 말처럼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시월드'라는 말은 애초부터 생겨나지도 않았을 것이다.
사실 타인의 심정을 있는 그대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타인에 대한 온전한 이해는 사람들이 처한 사회적, 문화적 맥락의 차이로 인해 이루어지기 어렵다. 타인에 대한 이해는 결국 자신의 처지 그리고 경험을 통해 형성된 수용의 폭 안에서만 가능한 것이다. 그러기에 타인의 처지나 심정에 대한 공감은 사람마다 각기 달라지게 되고 이는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종종 그 사실을 잊고 자신은 타인에게 너그럽게 대한다고, 때로는 자신이 손해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한 편으로는 타인을 이해한다고 하면서도 자신이 원칙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양보하지 않는다. 문제는 이 지점에서 갈등이 발생한다는 것이다.
영화 <다우트>는 진실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인간들 사이의 의심과 인간 주체 내부의 회의를 다룬다. 이것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주된 모티프이기는 하지만 여기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점에서 이 영화는 특별하다. 몇 개의 겹으로 이루어진 영화의 의미 층위는 이 영화가 표면적 주제와는 별도로 또 다른 복잡한 문제들을 제시한다.
학교의 유일한 흑인 학생인 도널드 밀러의 어머니, 밀러부인과 수녀원 원장이자 학교 교장인 알로이시스 수녀의 대화는 주체가 타자를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지난한 일인지를 분명하게 보여준다.
당신의 아들이 신부에게 성적 희롱을 받고 있다는 원장 수녀의 말을 밀러부인은 받아들이려고도, 인정하려고도 하지 않는다. 그녀에게 당면 목표는 아들이 무사히 이 학교를 졸업해서 더 좋은 상급학교로 진학하는 일이다. '진실'(물론 명확한 증거 없이 원장 수녀만이 진실이라고 믿는)에 대한 외면에 원장 수녀는 분노한다. 어떻게 어머니의 입장에서 아들이 그런 대우를 받고 있는데도 분노하지 않는 밀러 부인을 원장 수녀는 이해할 수 없다. 이성과 감성의 대립. 밀러 부인에게는 원장 수녀의 명백한 논리보다 자신의 아들을 무조건 지켜주는 애정이 더 소중하다. 그것이 비논리적이라고 해도 말이다. 원장 수녀의 '합리적 의심에 입각한 진실'은 '아들이 무사히 학교를 졸업하는 것'만이 소중한 밀러 부인에게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한다. 밀러 부인에게는 오히려 그 진실일지도 모르는 것이 자신을 불안하게 한다. 그는 온통 백인 학생들만 있는 학교에서 흑인인 자신의 아들을 감싸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의 성적 성향이 어떻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고 알고 싶지도 않은 것이다.
그러기에 둘에게 서로를 이해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어렵다. 원장 수녀는 어떻게 진실이 그런 하찮은 목표로 인해 외면당할 수 있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밀러 부인은 아들이 보다 좋은 교육을 받고 대학을 진학하여 자신과는 다른 사회적 지위를 얻는 것은 유일한 목표일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강렬한, 때로는 목숨을 걸만큼 소중한 욕망이자 신념인지 원장 수녀 역시 이해할 수 없다.

둘 사이에는 처음부터 건널 수 없는 강이 존재하고 있는 것이다. 이 강은 인종 문제 이와 연관된 사회 계급과 경제적 권력 혹은 지위 그리고 이를 기반으로 하는 정치사회적 입장 등의 담론들로 얽혀 있다. 백인인 원장 수녀와 하급 노동을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흑인 밀러 부인 사이에는 서로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들이 자신이 놓인 사회적 문화적 맥락을, 그리고 타자의 그것을 함께 바라보지 않는다면 둘 사이의 평행선을 좁히기는 불가능할 것이다.
이미지 출처 : http://movie.daum.net/moviedetail/moviedetailPhotoList.do?movieId=47514&t__nil_PhotoList=tabName
요즘 우리 사회 역시 맥락과 배경은 지워진 채로 어떤 사건들이 날 것 그대로 다루어지고 있는 것은 아닌지 한 번 돌아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진보와 보수라는 사실은 경계를 명확하게 짓기 어려운 범주로 나누어져 서로가 첨예하게 갈등과 반목을 반복하는 것도 이런 근본적인 문제가 작동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한 쪽은 원장 수녀로 또 한 쪽은 밀러부인이 되어서 말이다.
그렇다면 서로를 이해하는 기반을 마련하는 것은 결국 이러한 구조를 파악할 수 있는 힘을 가진 자들, 지식인들이 나서야 할 것이다. 하지만 작금의 현실은 이들 역시 큰 그림을 보지 못하고 또 하나의 원장 수녀와 밀러 부인으로 머물고 있는 것은 아닌지 걱정이 된다. 그렇다면 우리는 또 얼마나 많은 희생을 치르며 기다려야 한다는 말인가.
이글루스 가든 - 내맘대로 영화해석
덧글
타협이라는 말이 부정적으로 들릴 수 있다면 '공존'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사실 우리 사회는 수많은 가치관의 공존에 대해서도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우가 많거든요. 현재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가지 갈등들은 이런 '공존'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데 그 원인이 있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원장 수녀에게 '진실'인 것이 과연 밀러 부인에게도 똑같은 '진실'이 될 수 있을지 하는 의문이 듭니다. 영화 속에서 밀러 부인은 원장 수녀에게 "수녀님은 받아들여야 하는 것만 받아들입니다.(You accept what you get to accept)"라는 구절이 있습니다. 또 밀러 부인은 원장 수녀는 진짜 삶(life)에 대해서 잘 모른다는 말을 하기도 합니다.
"거만한 승냥이"를 찾아 학교의 규율을 바로 세우려는 원장 수녀에게, 진실이라는 거대한 이름 아래 존재하는 것은 플린 신부가 도널드 밀러에게 포도주를 줬다는 것, 그리고 그 둘이 부적절한 관계를 가졌다는 것일 것입니다. 그리고 그녀의 목표는 이러한 절대적인 진실을 밝혀 내는 것이지요. 하지만 밀러 부인에게는 원장 수녀가 가치를 부여하는 만큼의 '진실'은 없을지도 모릅니다. 그녀에게 있어서 '진실'만큼 거대한 절대적인 것은, 도널드가 좋은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에 진학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녀는 이 목표를 위해 애씁니다.
우리 사회 내에서도 구성원 각자가 개개인의 경험과 환경에 따라 의미를 부여하는 '진실'은 천차만별일 것입니다. 그리고 이 진실을 향해 세운 목표에 따라 반목을 지속하겠지요. 그런데, 영화 마지막 장면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I have such doubts"라는 말과 함께 오열합니다. 그 동안 자신이 굳게 믿었던 진실이 흔들리는 순간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을 테지요. 제 생각에, 영화는 이 장면을 보여줌으로써 우리가 절대적으로 믿어 온 '진실'의 존재에 대한 회의를 나타내는 것 같습니다. 쓰고 나니 윗 글과 거의 일치한 얘기가 돼 버렸네요. 과연 우리는 어떻게 반목을 해결해야 할지, 서로의 '진실'을 인정하고 이해해야 할지 아니면 서로의 근본적인 '진실'을 하나로 맞추어 나가야 할지 하는 씁쓸한 의문이 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