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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되려는 욕망 그리고 기억하는 자 구보, 영화를 보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1Q84의 덴고는 열살 때 교실에서 자신의 손을 아주 짧은 순간 꼭 잡았다가 사라진 아오마메를 잊지 못한다. 아오마메 역시 오직 덴고만을 생각하며 그외에는 아무도 진정으로 사랑하지 않는다. 열 살 이후 한 번도 만나지 못한 그들이 오랜 시간을 견딜 수 있었던 힘은 아주 짧은 시간 손을 꼭 잡았던 기억이었다. 


 기억이 삶을 이어가도록 만드는 가장 중요한 에너지임을 부인하기는 쉽지 않다. 개인의 기억은 근본적으로 그가 한 경험들과 맞닿아 있다. 그런 면에서 '돈을 가장 잘 쓰는 방법은 경험에 투자하는 것'이라는 어느 재테크 전문가의 말은 귀담아 들을 만하다. 여행이 그 자체로 경험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인정한다면, 여행에 쓰는 돈은 가장 현명한 투자 중의 하나가 될 것이다. 사람들이 여행을 하는 이유는 각기 다르다. 힐링일 수도, 미지의 공간에 대한 호기심일 수도, 자신의 무엇을 찾기 위한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여행이 필연적으로 강렬한 기억을 남긴다는 점에서는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다. 

 기억은 항상 감각의 차원에서 활성화된다. 여행에 대한 기억은 더욱 그렇다. 일본 야마시로 온천에서 아내와 갑자기 맞았던 일본해 북풍의 강렬함, 엘리도에 도착하자마자 먹었던 갓익은 망고의 상큼한 단맛, 크라비 바닷가 선술집에서 호주인의 노킹 온 헤븐스도어를 들으며 마셨던 맥주의 청량감, 안개가 채 걷히지 않은 이른 새벽 내소사 경내를 혼자 걸으며 들었던 풍경소리. 나에게도 기억은 늘 순간의 감각으로 인지된다. 아오마메가 자신의 손을 아주 짧은 순간 꼭 잡았던 감각을 기억하는 덴고처럼.  어쩌면 인간의 삶은 온통 기억의 조각들로 이어진 조각보일지도 모른다. 

그림 출처 : 중앙일보



 최근 개봉한 영화 <무뢰한><매드맥스:분노의 도로>는 흥미로운 작품들이다.  혹자는 두 개의 영화를 신데렐라 스토리에 비유하는 모양이다. 호박을 마차로 만들어 준 요정 할머니와 자신을 왕비로 맞이하는 왕자님을 믿었던 신데렐라처럼 <무뢰한>의 김혜경(전도연 분)은 남자들을 쉽게 믿는 반면, <매드맥스>의 퓨리오사는 아무도 믿지 않고 스스로 길을 만들어간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비유를 통한 해석은 절반의 성공에 그치는 것으로 보인다. <매드맥스>를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할만한 여지들이 있다는 점은 누구나 인정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퓨리오사가 걸어가는 길 그리고 그가 만든 길에는 항상 맥스가 동행한다는 사실을 놓쳐서는 안된다.  꿈꾸었던 녹색의 땅이 죽음의 땅으로 변했음을 알고 소금사막으로 떠나려는 퓨리오사와 여전사들을 그들이 탈출했던 공간으로 되돌아가도록 그래서 새로운 세계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한 존재는 다름 아닌 맥스였다는 사실이 이 영화를 페미니즘 영화로 규정하기 쉽지않다는 것을 일깨운다. 물론 맥스는 신데렐라에서 나오는 왕자님이라고 말하기는 어렵다. 모든 문제들을 맥스가 해결하지는 않는다. 또한  맥스는 퓨리오사와 여전사의 길고 위험한 여정에 동행한 조력자이며 그들이 모두 '함께' 문제를 해결한다는 점에 주목할 때 맥스가 신데렐라에 나오는 왕자님을 재현한 것으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에 <매드맥스>를 신데렐라의 스토리텔링을 극복한 것으로 보는 해석은 거칠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그보다는  개인들의 '기억되려는 욕망'이라는 키워드가 더 유효하지 않을까. 임모탄의 공격을 받아 사경을 해메던 퓨리오사를 바라보면서 맥스는 '내 이름은 맥스'라고 격렬히 외친다. 퓨리오사를 처음 만난 맥스가 '이름이 무엇이든 무슨 상관인가'라고 말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말이다. 이름은 하나의 존재를 가장 명징하게 기억하도록 만드는 기호라는 점에서 맥스의 외침은 퓨리오사에게 '기억되려는' 욕망의 발현체이다. 생성된 감정의 유대가 기억되려는 욕망을 자극한 것이다. 워보이 눅스는 어떤가. 눅스는 임모탄의 충직한 전사로 '기억'되어 전사들의 천국인 발할라로 가고 싶어한다. 임모탄이 약속한 천국이 허구임을 깨닫고 퓨리오사와 여전사들을 돕다가 죽음에 이른 순간에도 눅스가 외친 말은 '나를 기억해줘'였다. 퓨리오사와 맥스를 집요하게 공격하는 임모탄 역시 기억되려는 욕망에서 자유롭지 않다. 임모탄이 퓨리오사와 맥스를 그토록 괴롭혔던 것은 자신의 자식들을 임신할 수 있는 다섯 명의 여인들을 되찾아오기 위해서였다. 임모탄이 죽은 스플렌디드가 사산한 남자 아기를 안고 광기에 사로잡혀 오열했던 것은 자신의 사후에 기억될 수 있는 물리적 실체가 사라진 것에 대한 좌절이 그만큼 컸기 때문이다.              
         

 기억되기의 욕망은 필연적으로 기억하는 자를 호출해낸다. 영화 <무뢰한>에서 김혜경은 기억하는 자이다. 살인을 저지른 남자를 기억하고 그를 쫒는 형사 정재곤(김남길 분)을 기억한다. 얼핏 보면 정재곤은 범인을 잡기 위해 김혜경을 철저히 이용하는 남자로 이해하기 쉽다. 그러나 정재곤의 의식에서 드러나는 균열지점을 바라보자. 그 역시 자신이 김혜경에게 그렇게 기억되는 것에 두려워하고 있다. 그 두려움은 작게는 김혜경이 가장 좋아했지만 빚 때문에 중고명품샵에 팔아버린 귀고리를 되사서 건네주는 행동으로 드러난다. 물론 가장 분명하게 드러나는 부분은 자신을 찌른 김혜경에게 보이는 반응이다. 김혜경은 자신을 나락으로 떨어뜨리고(물론 이는 김혜경의 생각이지만)  인생의 막장에서도 또다시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버린 정재곤을 저주하며 칼로 찌른다. 하지만 정재곤은 주변에 범인을 체포하고 있는 경찰들이 있었는데도 도움을 요청하기는 커녕, 그냥 태연히 보낸다. 김혜경이 찌른 칼을 복부에 그대로 둔 채 비탈길을 비틀거리며 내려오는 그의 얼굴에 비친 쓴 웃음은 그녀에게 냉혈한으로 기억되지 않으려는 욕망의 다른 모습이다. 정재곤이 김혜경을 사랑했는지까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그의 내면에는 자신이 처한 모순적 현실을 헤치고 나갈 수 있는 길을 만들어내면서도 김혜경에게 결코 냉혈한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는 욕망이 복잡하게 얽혀있었음을 짐작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렇지 않다면 영화 내내 비치는 정재곤의 과잉된 고독감을 설명하기 어렵다. 

출처 : 네이버 영화 



 기억되려는 욕망이 온전히 기억하는 자에게 실현된다는 믿음은 그 자체로 환타지일 것이다. 정재곤의 욕망은 그 자신의 욕망일 뿐, 그것이 김혜경의 기억에서 실현될지는 알 수 없다. 기억되려는 욕망과 기억하는 자는 별개의 존재이다. 그렇기에 기억되려는 욕망은 항상 애절하고 때로는 비장해질 수밖에 없다. 수많은 영화에서 보게 되는 '나를 기억해줘' 류의 씬(scene)들이 그토록 애절했던 것은 기억되려는 욕망이 실현되기를 확신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기억되려는 욕망들은 끊임없이 기억하는 자를 지향한다. 그것은 기억되려는 욕망이 지닌 천형이자 운명일 것이다.      



덧글

  • 복잡미묘 2015/06/10 14:21 #

    기억되려는 욕망... 잘 읽었습니다. 매드맥스와, 1Q84 그러고보니 잊혀지고 싶지 않은, 잊혀지지 않는 기억에 관한 얘기네요.
  • 초코크림 2015/06/10 14:33 #

    방문 감사합니다.
    누구나 누군가에게 기억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써 본 글입니다. 그러고보니 잊혀지지 않는 기억 역시 매드맥스와 1Q84를 꿰뚫는 키워드일 수 있겠네요. 퓨리오사의 녹색의 땅에 대한 기억, 아오마메와 덴고가 공유한 기억. 그들의 기억은 결코 잊혀지지 않는 기억이자 자신의 존재 이유를 부여하는 기억이겠지요.
  • 멜랑 2015/06/10 14:31 # 삭제

    매드맥스에서 임모탄의 아내가 죽어서 슬퍼하는 건 건강한 인간을 낳고 싶은 욕망이라 생각했습니다. 매드맥스 보면 그리 건강한 인간들이 없으니 말이죠. 나름 지도자인 임모탄은 2명의 아들이 있는데 호흡기 질환과 신체적인 질환을 갖고 있으니 건강한 자식을 가지고 싶은건 당연한 욕심이라 느꼈습니다. 무뢰한 같은 경우는 기억이란 키워드 보단 연민이란 키워드가 더 어울릴듯 합니다. 마지막 장면을 보면 남자 주인공이 이젠 됫다 라는 표정을 지니면서 마무리가 되니 말이죠.
  • 초코크림 2015/06/10 14:40 #

    흥미로운 의견입니다. 진화심리학적 측면에서 보면 자식 낳기는 자신보다 더 나은 유전자를 세계에 남기려는 본능과 연결되지 않을까요. 자신이 죽은 후에도 자신이 가장 명징하게 기억될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지요. 건강한 자식에 대한 욕심은 유월한 유전자를 가진 개체들이 자신의 존재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말해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무뢰한>의 경우도 왜 정재곤이 김혜경에 연민을 느끼게 될까요. 정재곤은 결코 간단한 인물이 아닌 것 같습니다. 연민의 감정만이라면 오히려 다른 방법을 취할 수도 있지 않았을까요. 연민은 애정과 연결되며 애정은 다시 형사 정재곤이 처한 모순된 현실과 갈등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정재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요. 저는 그런 측면을 좀 더 깊이 생각해보고 싶었습니다.
  • 도서관 개구리 2015/06/11 17:53 # 삭제

    기억되려는 욕망이 기억을 지우고 기억하는 자를 만들려는 욕망은 거울 속 밀랍인형을 만든다. 잔자와 후자는 삶의 이유가 될 수 있을까? 어려운 문제다.
  • 모순덩얼이 2015/06/17 01:33 #

    기억되려는 욕망은 누구에게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에 대한 주제는 문학적으로 상당히 많은 글이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필멸자이기에 자신이 없어진 뒤에 자신의 존재가 있었다는 것을 남기고 싶어하는 것은 필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매드맥스도, 무뢰한도 아직 보지 않은 저로써는 이 글의 내용으로 여화를 설명할 수 있는 지 없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기억되고 싶어하는 욕망이 애절하고 비장하다는 이 글의 마지막 말에는 심히 공감이 가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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