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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표에 불과한 욕망, 그 허망함의 끝 구보, 영화를 보다



 이와이 슌지의 <4월 이야기>는 여느 영화에 비해 매우 짧은 편이지만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로 인해 좀처럼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 작품이다. 우즈키(마츠 다카코 분)는 짝사랑하는 고등학교 선배 야마자키(다나베 세이치 분)와 같은 학교에 다니기 위해 고향 홋카이도를 떠나 도쿄의 무사시노 대학에 진학하는 것이 목표다. 그녀에게 도쿄는 무사시노이고 무사시노는 곧 야마자키가 있는 곳이다. 야마자키가 없다면 무사시노도 그리고 도쿄도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것이다. 우즈키가 열심히 공부한 것도 그래서 무사시노 대학에 원서를 내고 마침내 도코행 기차를 타려는 것은 오로지 선배 야마자키를 만나기 위해서이다. 결국 도쿄와 무사시노에 대한 우즈키의 욕망은 야마자키 선배를 가까이 보고 나아가 그와 연인이 되는 것에 맞닿아 있다.




공간은 주체가 구체적인 행위를 통해 자신의 욕망을 실현하기 위한 물리적 가능성을 담보한다. 다시 말해 특정한 행위가 가능해야만, 적어도 그 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려 있어야만 의미를 갖는다. 만약 야마자키 선배가 진학한 대학이 무사시노가 아니라 와세다나 게이오였다면, 혹은 교토에 있는 도시샤였다면 우즈키가 무사시노를 동경하거나 도쿄행을 그토록 열망했을 리 없다. 무사시노와 도쿄는 야마자키가 있는 공간이기에 의미가 있는 것이다.


이처럼 공간은 특정한 행위를 가능하게 하는 물리적 실체이며 그 행위와 연계될 때 비로소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그러하기에 <곰스크로 가는 기차>는 여러가지로 의문이 남는다.  "곰스크는 내 유일한 목표이자 운명"이며 "그곳에 가서야 내 삶이 새로 시작"된다는 '나'의 말은 그가 곰스크행 계획을 세운 것이 오래 전 일이었음을, 그곳에서만 자신의 삶이 새로 시작될 수 있다는 확신은 자신의 인생 모두를 걸고 있음을 말해준다. '나'에게 곰스크는 자신의 인생 그 자체라면 곰스크에 왜 가는지 묻는 호텔 여주인에게 "그냥 일단" 곰스크로 가는 게 목표라는 '나'의 대답은 허망하게 들린다. '그냥, 일단"이라는 말은 곰스크로 가려는 '나'의 강렬한 열망이 기의가 사라져버린 단순한 기표에 불과한 것으로 바꾸면서 결과적으로 '나'의 욕망의 민낯을 비추기 때문이다. 선배를 만나기 위해 도쿄로 가려는 우즈키와 달리 '나'에게 곰스크는 '가야할 곳' 이상의 의미를 갖지 못한다.


 왜 '나'는 우즈키와 다른가. 둘 다 특정한 공간에 가려는 욕망은 동일함에도 우즈키와 달리 '나'는 곰스크에서 어떠한 계획도 가지고 있지 않을까. 이 물음은 중요하다. '나'의 욕망이 기의가 없는 텅빈 기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드러내는 열쇠가 되기 때문이다. '나'가 곰스크행을 열망한 이유는 소설이나 드라마 모두에 드러나지 않는다. 다만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아버지는 나를 무릎에 앉혀놓고 곰스크에 대해 설명해주셨다"는 부분에서 한 번도 가본 적이 없는 곰스크행에 관한 욕망은 '나'의 아버지에게서 비롯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뿐이다.  아버지와 다른 이들에게 들은 풍문은  곰스크에 대한 환상을 만들어내는 밑거름이 되었을 것이다. 또한 이런 구도는 '나'의 곰스크행 욕망이 '나' 자신의 것이라기 보다는 아버지의 욕망일 수도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나'는 자신의 욕망 실현자가 아닌 아버지 욕망의 대리자로 전락하게 된다.



 욕망을 대리 실현하려는 동력은 본질적으로 지속력을 갖기 어렵다. 자신의 욕망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욕망의 기원이 너무나 오래되었기에 '나'는 자신과 아버지의 욕망을 구별하지 못한다. 자식을 낳고 마을의 교사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곰스크행이 가능하지 않게 된 상황에서도 곰스크행 특급열차의 기적소리를  듣고 우울해 하는 것은 기원이 지워진 욕망이 사라지지 않고 그 흔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 흔적은 위험한 것이다. 해소되지 않은 욕망이 남긴 흔적은 또다른 가짜 욕망을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나'가 그랬던 것처럼 '나'의 자식 역시 곰스크행을 열망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기의를 상실한 욕망은 끊임없이 미끄러지면서 또다른 욕망들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결국 '나'는 기원이 지워진 욕망의 노예로 살아가는 슬픈 시찌프스일 뿐이다. 동력을 잃은 욕망의 흔적은 그가 죽을 때까지 찢어질 듯한 기차의 기적소리가 울릴 때마다 그를 다락방에 가두고 눈물을 흘리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 연민을 보낼 수는 없다. 우리 역시 '나'를 통해 자신의 모습을 보기 때문이다.  








덧글

  • 2015/10/05 21:43 # 비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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